쓰디쓴 인생의 고배를 맛보고도 세월의 무상함에 미소 지을 수 있다면, 바다 위 고요한 슬픔을 안고 시간 속에 멈춰 있는 섬, 교동도로 떠나보자.

강화군의 북서부에 자리한 교동도는 우리나라에서 14번째로 큰 섬으로 강화도에서 배로 10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배를 타는 여행자의 마음은 약 8할의 기대감으로 한껏 물이 차오른다. 교동도는 어떤 빛을 품었을까. 교동도는 사랑에 빠진 연인을 닮았다.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하늘과 바다는 이미 그 경계선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하지만, 교동도 안에는 수많은 삶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흩어진 듯 모여 있는 작은 마을과 역사의 흔적들이 여행자를 기다린다.

 

교동향교

 

교동향교는 잘 알려진 것처럼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진 향교이다. 고려 인종 5년인 1127년. 안유 선생이 문묘에 공자상을 봉안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 중국으로 가는 통로였던 교동도는 예부터 수많은 학자들을 배출했다. 그 뿌리에는 바로 교동향교가 있었다. 학문에 뜻을 둔 유생들은 교동의 주산인 화개산의 기운을 받아 학문에 매진했을 것이다. 지금도 이 곳 대성전에는 공자와 맹자를 비롯한 성인들과 이황, 송시열, 최치원을 비롯한  우리 선조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좁게는 자기 마음을 수양하고 넓게는 팔도를 가슴에 품었으리라. 이제 외로운 유적지로 남은 이 곳엔 유생들의 좋은 벗이 되었을 나무 혼자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과거의 그들을 만날 수는 없지만 뒤뜰에서 마시는 약수 한 모금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교동은 흔히 왕들의 섬으로 불린다. 고려 21대 왕인 희종을 시작으로, 11명의 왕족이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교동면 읍내리에 있는 부근당은 마을 주민들이 연산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당집을 짓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그 인근에는 과거 읍성의 흔적이기도 한 교동 남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 옛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을 드나들었을까. 멈춰버린 시간 위로 겹겹이 쌓인 마음이 이끼처럼 피어난다.

 

천년 가까이 터주대감처럼 교동을 지켜온 것은 은행나무 한그루이다. 보호수로 지정된 이 나무의 나이는 수령이 천 년 가까이 되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나무에게도 영이 있다고 믿었다. 마을 주민들은 이 나무 앞에서 풍년과 자식 번창을 기원했으리라.  그 긴 시간동안 나무는 얼마나  많은 소원을 들어주었을까. 그 갸륵한 마음이 궁금해진다.

사람들의 소망을 들어주던 것은 나무뿐만이 아니었다. 파란색 지붕에 빨간 십자가 하나. 이곳이 교동도 최초의 교회다. 울리지 않는 종소리가 귓가에 닿을 듯하다. 마음에 품은 소망은 삶의 에너지다. 심연에서 일렁이던 그 에너지가 붉은 피가 되어 타오르는 순간, 이내 솟구치듯 발화된다. 그런 삶의 흔적은 마음에 새겨져 숨길 도리가 없다.

 

교동시장

 

햇살처럼 투명한 삶의 현장은 오히려 정겨운 것. 한국 전쟁 이후 형성된 교동시장은 옛날 모습 그대로다. 시간이 멈춘 교동도에 가면 정겨운 삶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교동도의 주산인 화개산에 오르니 곧은 산새가 교동도를 느끼게 한다. 벌써부터 고개를 내민 초록은 수줍은 눈인사를 건넨다. 마음은 허공을 맴돌고 뜨거운 심장은 힘차게 뛴다. 석모도와 강화도가 한 눈에 들어오는 화개산 정상. 푸른빛의 어울림 속에  비로소 하나가 된 교동도는 분단으로 생긴 상처를 껴안고 교동의 바다는 아무도 몰래, 숨 죽여 운다.

삶의 찌꺼기를 버리고 돌아서니 바닷바람에 날아갈듯 가볍다. 서해 바다의 매력은 시간 속에 흐른다. 때가 되면 차오르고 또 다시 비워지기를 반복하는 것. 삶도 그러하다는 깨달음을 얻기까지 수많은 길을 돌아왔다. 쓸쓸한 인생의 바다 위에서 적당한 높이와 깊이를 찾아가는 것. 그것은 얼마나 오랫 동안 헤매야 찾을 수 있는 보물인가. 가까워진 듯 멀어져 있는 파도처럼 여행자의 깨달음은 찰나에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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