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벌써 5년 전 8월의 마지막 금요일, 세탁기를 돌리고 책상 앞에 앉았는데 트위터 타임라인에 아일랜드 시인 셰이머스 히니(Seamus Heaney)의 이름이 비쳤습니다. 전 당장 스크롤을 내려 다른 트윗들을 확인했어요. 부고였습니다. 세기가 바뀌고 일흔을 넘긴 뒤에도 왕성하게 활동했던 이 시인을 저는 언젠가 한번 직접 만날 수 있는 날이 오진 않을까 생각했었습니다. 정말 그런 날이 오면 무슨 책을 내밀며 서명을 부탁할까, 어떤 인사말을 건넬까 상상하기도 했지요.

셰이머스 히니의 부고

흑백사진으로만 남은 옛 시인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시인들은 책 속에서밖에는 만날 수 없지만, 1995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이 노시인만큼은 우리와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기쁘고 든든하고, 또 그가 느낄 감회들을 상상하면 한편 안타까워지곤 했었습니다.

 

셰이머스 히니

△ 아일랜드 국민 시인 셰이머스 히니 (출처: culturenorthernireland.org)

 

그가 나고 자란 아일랜드의 가난한 농촌을 그린 시, 연장이 흙에 부딪는 소리가 들리고 젖은 흙냄새, 다친 감자알의 풋풋한 비린내가 맡아지는 생생한 시들. “자유”가 “매일 밤 줄어들”던 어느 여름, 경찰이 섬광등을 흔들며 그의 차로 다가와 이름을 묻는 장면(“이름이 뭔가, 운전사?”/ “셰이머스…”/ 셰이머스?). 먼 과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지금 그가 서 있는 땅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꿰뚫어보는 글들, 그리고 늪에서 미라로 발굴된 고대인들에 대해 쓴 저 유명한 ‘늪(bog)’ 시편들.

김정환 시인이 우리말로 옮겨 펴낸 두툼한 시 전집을 아직 채 다 읽지 못했을 정도로 방대한 히니의 작품 중에서 제가 지금 기억하는 초기 시 한 편은 아마도 히니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이 모태가 되었을 시입니다. 가족들이 자신을 찾으며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큰 나무 몸통 빈 구멍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어린 아이를 묘사한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숨어 있으라 버드나무의/ 텅 빈 몸통 속에.”

 

그 귀 기울임 낯익으니,

여느 때처럼, 그들이

뻐꾹뻐꾹 네 이름

들판 너머로 울 때까지.

너는 들을 수 있다 그들이

장벽의 막대기 잡아당기는 소리

그들이 다가오며

너를 꾀어낼 때에:

나무 갈라진 틈에

작은 입과 귀,

이끼 낀 장소의

귓불과 후두부.

― 셰이머스 히니, ‘신탁(Oracle)’

 

어느덧 아이는 큰 나무의 귀와 발성기관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 아이는 곧 무언가를 ― 무언가 귀중한 메시지를 듣고 말하게 되겠지요. 백석의 시 ‘고방’에도 이와 비슷한 구절이 나옵니다.

 

녯말이 사는 컴컴한 고방의 쌀독 뒤에서 나는 저녁 끼때에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못 들은 척하였다

 

이 아이들은 남몰래 옛 이야기(“녯말”)를 듣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무도 이야기해 주고 있지 않은, 어느 어른의 입에서 들리는 것이 아닌 이야기, 그러나 언젠가 누군가 애틋한 이가 품에 안고 들려주었거나 그림책을 짚어 가며 읽었던 이야기, 얼핏 들은 구설과 농담들, 꿈과 뒤죽박죽된 기억들, 비가 쏟아지고 개기도 하는 하늘과 땅, 풀과 나무, 온갖 사물이 발설하는 신호들 — 그런 것들이 거품처럼 일으키는 이야기였겠지요.

 

아이들이 어른 모르게 듣는 이야기

 

백석

△ 시인 백석

 

엄마 아빠가 한눈을 팔거나 잠자코 있을 때, 혼자 모래를 헤집거나 장난감 기차를 밀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몽상에 잠긴 그 잠깐 동안, 아이들은 마음속으로 어떤 이야기를 들을까 생각해 봅니다. 옷장 속에, 의자 밑에, 이불 속에 숨는 아이는 그 속에서 무슨 얘길 만드는 것일까요?

그러고 보니 저도 어렸을 때 스머프만 한 난쟁이들이 우리 집에 찾아와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그들을 숨겨줘야 하는 상황을 상상하며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두툼한 이불을 부풀려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누우면 그 안에 희미한 빛이 들어와 아늑한 굴처럼 되거든요. 그 안에선 꿈처럼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들이 펼쳐졌습니다.

특히 동생과 나란히 누워 상상력을 합치면 — 어머니의 꾸중을 듣고 억지로 잠을 청할 때까지 한두 시간은 족히 아예 한 왕국의 흥망성쇠를 관통하기도 했지요. ‘열매 공주’는 동생이 만든 수많은 캐릭터 중 하나였고, ‘멜론 호수’는 우리가 날마다 찾았던 장소였습니다.

 

‘디지털 원주민들’만의 상상력을 생각하다

 

그렇다면 디지털 시대에 나고 자라 우리와는 다른 식으로 세상을 볼 우리 아이들, 소위 ‘디지털 원주민들(Digital Natives)’은 과연 어떤 식의 이야기 동굴을 갖게 될까요? 자신의 호기심과 의지, 동작과 선택이 각기 나름의 개성을 지닌 가상공간, 가상현실과 접합하는 경험을 하며 자라는 아이의 상상력은 과연 어떤 상상력일까 ― 저는 문득 궁금해집니다.

상상력

 

감탄할 만큼 창의적인 어린이 책과 장난감들, 무엇보다 휴대전화, 태블릿을 비롯한 디지털 디바이스를 통해 우리보다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다양한 감각 피드백을 받으며 자랄 아이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개념을 만들어가는 방식도, 자신이 조작하거나 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을 확인하는 방식도 우리와는 사뭇 다를 것입니다.

그리고 셰이머스 히니가 그의 또 다른 초기 시 ‘땅파기(Digging)’에서 창밖으로 감자 캐는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 손가락과 엄지 사이/ 웅크린 펜 하나 놓여 있다/ 나는 이걸로 땅을 파겠다”라고 썼던 것과는 다소 이질적인 감수성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쓰는’ 것은 더 이상 ‘(종이를 흙처럼) 파는(digging)’ 것도, 혹은 ‘새기는’ 것도 아니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 아이들도 우리의 눈을 피해 어디론가 숨을 것입니다. 밥 먹으라고 부르며 찾아도 못 들은 척하겠죠. 우리의 사랑을 아는 아이들은 우리의 사랑이 모르는 그곳에서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사물의 귀가 되고 입이 될 것이며 우리가 차마 들려주지 못한 이야기를 들을 것입니다. “숨어있으라”라는 신탁이 미래의 시인들에게, 또 다른 셰이머스 히니들에게 내려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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