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색깔의 이름을 나는 고동색으로 이해하고 있다. <색채도감>에 그 색의 정확한 고유명이 어떻게 써 있는지 모르지만 목수였던 아버지는 그렇게 불렀고, 그 색에 유달리 집착하셨던 것 같다. 당신의 색채 작업은 장인의 모습이나 다름없었다.

선지빛 같기도 하고, 오동나무색에 빨간색을 덧칠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빨강도 아니고 주황도 아닌, 대하의 흙빛 색깔 같으면서도 따뜻한 그 색깔을 나무 결 위에서 꽃피우기 위해 몇 날이고 정성에 정성을 쏟던 아버지의 기억이 새롭다. 내 유년의 고샅길에는 그 색이 덮여 있고 나는 지금도 그 색채를 ‘아버지의 색깔’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나는 그 색깔을 이번 여름 노르웨이의 길에서 다시 만났다. 노르웨이는 나라 전체가 숲으로 형성돼 있다 할 정도로 수목의 건강함이 넘쳤다.

노르웨이를 수채화폭에 담을 때 반드시 넣어야할 숲과 호수와 하늘은 마치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 낮은 색채 계통이라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서 있는 고동색 집이 나를 이끌었다. 나는 그 색을 감히 ‘노르웨이 색’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고동색 집이 노르웨이의 현상만은 아니다. 유틀란트 반도, 보른홀름 섬, 혹은 스톡홀름으로 오르는 길목 등 북구의 길목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북구적인 색채라고 말할 수 있다. 허나 유독 노르웨이에서 그 색채가 제 맛이 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기울어진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칠흑 같은 밤길, 몇십 리나 이어지는 피오르드fiord를 따라서 산길을 헤쳐나와 고도가 정확히 분별 안 되는 저만치에서 그 색깔의 작은 노르웨이 집을 만났을 때, 아니면 바람이 세차고 황량하기 그지없는 베르겐Bergen 가는 길목 한 호수를 중심으로 드문드문 서 있는 고동색 집을 만났을 때의 노르웨이는, 그 색을 싸안고 있었고 고동색 집은 노르웨이의 그 쓸쓸함을 데워주고 있다고 말해도 되나.

이 글은 나의 이번 여름 노르웨이 휴가 감상문이다. 정확히 오슬로에서 베르겐, 그리고 베르겐에서 크리스 탄산드라는 덴마크로 가는 항구 도시까지 돌아다닌 짧은 여행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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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 대학 앞에서 만난 한 청년은 나의 베르겐행에 7번 도로를 추천해 주었다. 여행의 기쁨을 만끽할 것이라는 인사도 덧붙였다. 7번 도로는 가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아주 구불구불한 길이지만 ‘어드벤처 웨이(adventure way)’라고 해서 그 정경이 소문난 길이다. 그 길로 무작정 들어섰다. 모든 것이 준비되고 예비돼야 직성이 풀리고 불안감에서 벗어나는 일에 종속된 일상에서 그렇게 떠나는 것도 작은 일탈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그런 것을 이렇게라도 겪을 수 있다는 나의 시간이 고맙기조차 했다. 일과 휴식의 문제는 향후 정보화 시대의 최대 과제가 아니겠는가.

노르웨이의 길은 노르웨이의 숲이라 칭해도 좋으련가. 길이란 길은 죄다 숲에 포근히 감싸 안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전에 모 씨가 보내준 일본 작가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소설은 현대 일본 젊은이들의 눅눅한 사랑을 묘사하고 있지만 내가 만난 노르웨이 숲은 노르웨이인의 보금자리이자 안식처였다.

숲이 이루는 풍경 가운데 7번 도로에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편지함이었다. 노르웨이 숲의 우편함은 모두 다 집나간 자식처럼 길가에 내걸려 있었다. 모름지기 편지함이란 ‘나의 집이 이곳’이라는 또 하나의 문패 역할을 하고 있는데, 노르웨이에서는 편지함만으로 집을 연결시킬 수 없다.

한 골목 안에 다섯 채의 집이 있다면 그 골목 입구의 신작로에는 반드시 그 수만큼의 편지함이 걸려 있다. 그러니까 길을 가다가 편지함이 두 개만 걸려 있으면 그 언저리에는 두 가구가 사는 것이다. 물론 초록색 편지함 외에 빨간 통이 하나 더 붙어 있는데 그것은 편지 수집, 말하자면 우편함이다. 노르웨이 숲에서는 우편 배달부가 가가호호를 방문해 편지를 주고받는 애틋함은 없다. 그 점에서 노르웨이 숲은 삭막하기 그지없다. 그 숲길에 우편함 번지수의 주인집은 보이지 않고 비를 맞고 있는 7번 도로의 우편함이 쓸쓸해 보였다.

우린 근처 산중턱에 있는 그 고동색깔의 어느 호젓한 민가에서 장작불을 다시 지피며 하룻밤을 보냈고 그 다음날 만난 것이 피오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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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르드 한국의 산수가 그러하듯 그건 노르웨이적이라고 얼버무려 말할 도리밖에 나에겐 없다. 피오르드의 규모와 형태 등은 이미 알려져 있는 바이지만 내가 받은 강렬한 인상은 그것이 노르웨이인들의 삶과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피오르드는 거대한 산줄기를 후벼파고 내려오는 듯한 폭포를 껴안고, 깎아지르는 것 같은 절벽을 병풍 삼아 하나의 거대한 침묵의 호수를 형성하고 있다. 협곡의 거센 물살을 내지르는 피오르드의 모습은 태초의 얼굴이자 화장기 없는 다양한 모습을 연출해내는 자신감 넘치는 여인의 얼굴 같았다. 노르웨이인들은 그 태초의 자연을 바라보는 풍경이 아니라 자신들의 등받이로서 거울 삼으려 삶의 공간으로 함께하고 있었다.

피오르드가 있으면 반드시 그 고동색의 노르웨이 집이 있었고, 노르웨이 국가가 어느 대사관저에 걸린 국기처럼 펄럭였다. 7번 도로의 끝자락에서부터 베르겐까지 피오르드를 따라 형성된 마을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노르웨이 지도를 펼치면 백지에 물방울을 떨어뜨린 형상처럼 피오르드가 찍혀 있지만 거기에는 바로 노르웨이인의 삶의 숨결이 고루 채워져 있는 셈이다.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피오르드와 피오르드를 산맥의 허리를 뚫어 죄다 연결시켜놓은 노르웨이인들의 기술과 지혜였다. 적어도 노르웨이인들에게 길에 관한 한 불가능은 없었다. 도무지 연결될 수 없는 산세와 지형을 어떻게 측량해 뚫었는지 내내 궁금했다. 어떤 터널은 10여 킬로미터 이상이나 된다. 하나의 피오르드에 정신이 팔려 가다가 길이 막히면 터널이 나오고 그 터널의 어둠을 빠져나오면 자동차의 그리스빛 같은 고운 물빛의 피오르드가 고동색 집을 안은 풍경이 동화처럼 펼쳐지는 것의 연속이었다. 험하고 먼 길이지만 조금도 지루할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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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전에 좀더 조예가 있었다면 그 공간은 값진 기록으로 남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크다. 터널이 하도 많이 아내는 마흔 몇 번째인가를 세다가 그만 짜증난다며 잠이 들었다. 그 터널의 끝이 바다이자 베르겐이다. 말하자면 피오르드의 관문이다. 그런 탓인지 베르겐에 도달했을 때 땅끝 마을에 온 듯한 막막함, 또는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이 짓눌렀다.
베르겐은 위치상 고도나 다름없다. 베르겐에서 길을 의미할 때 그건 바다였다. 일곱 개 산으로 첩첩 둘러싸인 항구 도시 베르겐의 시야는 바다에서만 온전했다. 오늘날과 같은 터널이 열리지 않았다면 베르겐의 길은 영원히 바다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실 베르겐의 영광은 바다에 기원을 두고 있고, 바다 때문에 여전히 행복할 따름이다. 중세 함부르크를 중심으로 형성된 한자동맹의 주요 거점 도시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도시의 나이는 11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13세기부터 1830년까지 노르웨이 최대의 도시로서 명성을 떨쳤다. 아침이면 싱싱한 고기들이 좌판에서 퍼득이는 어시장을 돌아 오른편으로 가면 보이는 브리겐(Bryggen) 거리에는 베르겐이 한창 기세를 올리던 시절의 목조 건물군이 관광 상품 그 자체로 번지수를 달고 있다. 독일 뱃놈들이 꽤나 들락거리며 흥청댔음은 삐걱거리며 옛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는 주점의 풍경이 잘 연출해내고 있다.

브리겐 거리의 건물은 유네스코에서 역사적 건축물로 지정했다. 베르겐이 뱃전의 고동 소리와 비린내만으로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변방에서 한 음악가의 선율이 뱃고동처럼 웅장하게 울리고 있는 것이 이 도시의 자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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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겐의 영웅, 아니 노르웨이의 영웅 나아가 신화적 인물로 추앙받는 음악가 그리그(Grieg) 탄생 1백50주년은 베르겐, 나아가서 노르웨이 국민의 축제이다.

그리그는 말했다.

“나의 음악적 영감은 나를 감싸는 모든 주변 환경, 베르겐의 자연에서 나온다. 베르겐의 거리 하나하나도 나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주었다.”

탯줄의 고향에 대한 그 이상의 찬사가 있겠는가?

주마간산 격으로 지나온 노르웨이의 산하를 생각하면 그 산하의 끝자락에서 그 산하의 정기를 모태로 해서 한 위대한 음악가가 태어났다는 결론에 이른다.

베르겐 응용미술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그리그 1백 50주년전>에서 만난 그리그의 외모에선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의 음악이 들려주는 장엄함, 무거운 울림, 엄숙함, 그리고 영원성 같은 것은 노르웨이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언정 그는 너무도 왜소했다. 그는 키가 1백52센티미터였다고 기록은 말한다. 아내 니나보다도 2센티미터 작았다. 빛 바랜 백발의 그리그의 사진은 그 때문인지 소년 같아 보였다.

그는 나그네였다. 어떻게 보면 그의 음악 인생에서 베르겐은 정신적인 어머니로만 작용했는지 모른다. 그는 15세 때 음악 공부를 위해 독일의 라이프치히로 떠나는 것을 시작으로 평생 유럽을 떠돌았다. 그는 떠돌면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반드시 돌아와 고향에서 작품으로 완성했다.

그가 코펜하겐, 로마, 런던, 파리, 바르샤바 등을 떠돈 것은 문화적인 자양의 섭취도 있었지만 병 치료도 그 이유였다. 그리그는 그 점에서 불행한 자연인이었다. 위대한 자들이란 늘 그런 것인가. 그는 폐병으로 평생을 고생했다. 그는 코펜하겐 등 도처의 물 좋다는 곳에서 요양 생활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베르겐 시에서 공항 가는 길목의 15분쯤 거리인 홉(Hop) 시의 트롤드하우겐(Troldhougen)에 위치한 그의 생가노 노르다스라는 호수를 끼고 있다. 그는 안채 외에 별도의 잡곡실을 갖고 있었다. 책상 하나, 작은 소파 하나와 집기 등이 보존돼 있는 고동색깔 작은 오두막 같은 작곡실의 창은 호수와 연결돼 있다.

그의 대부분의 오선지는 이곳에서 그려졌다. 올해 1백50주년 기념으로 짜임새 있게 기획된 음악회가 여름내 이곳에서 열렸는데, 그때 안채에 있는 그리그가 쓰던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사용됐다.

음악에 관해 문외한인 나에겐 그 연대기보다 한 예술가가 부활해 살아 움직이는 그 저변의 풍경이 아름다웠고, 사실 부러웠다. 그건 분명히 노르웨이의 고귀한 재산이었다. 노르웨이 그 산하의 숲 소리, 피오르드로 내리치는 폭포수의 명징한 소리가 사실상 그리그의 A단조 곡이 아니겠는가. 베를린에 돌아와 행사가 열리는 박물관의 캐린 양에게 그리그 자서전을 뒤늦게 주문해 전해 받았다.

그리고 돌아온 도시에는 자연과 사람 그런 류의 단어가 유령처럼 떠돌고 카뮈의 ‘일상’만이 책상 위에 수북했다. 노르웨이에 갔었다.

글:신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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