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세. 허영만, 고행석, 이재학 등 스타작가들의 전성기
모든 전성기에는 창조자와 같은 ‘슈퍼스타’가 있기 마련이다. 80년대 한국대중음악계의 스타가 ‘조용필’이였다면, 80년대 만화계의 슈퍼스타는 ‘까치 오혜성’을 만들어 낸 작가 ‘이현세’라는데 자타의 이견이 없다. 1983년 발간된 <공포의 외인구단>(이하 외인구단)은 사회 전반에 걸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외인구단>은 86년 이장호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면서 식을 줄 모르는 인기를 이어갔고, ‘이현세’와 ‘까치’라는 이름은 한국 만화를 상징하는 브랜드가 되었다. 84년 총 30권으로 완결된 <외인구단>은 한국 만화계의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는데, 40~50권에 이르는 장편 극화가 대본소 만화의 대세를 이루게 된 것도 <외인구단>의 영향이 컷다.
이현세는 <외인구단>의 성공 이후 <지옥의 링(1983)>, <제왕(1986)>, <사자여 새벽을 노래하라(1987)>, <며느리 밥풀꽃에 대한 보고서(1988)>, <아마게돈(1988)> 등 연이은 히트작을 내놓으며, “만화방은 이현세가 먹여 살린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한국 만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슈퍼스타는 전성기의 필수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슈퍼스타에 필적할만한 거물들의 리스트가 함께 존재해야만 하나의 ‘시대’로 기록될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동시대에 공존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시대에 ‘이탈리아 르네상스’라는 특정한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80년대 슈퍼스타 이현세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국 만화를 만개시켰던 작가들의 면면은 놀랍다. 지금은 <식객>으로 유명한 허영만, <아기공룡 둘리>의 김수정, <신의 아들>의 박봉성, <촉산객> 시리즈의 이재학, <불청객> 시리즈의 고행석 등은 이현세에 필적한만한 블록버스터급 작가들로 지금도 이름이 회자되고 있다.
특히 허영만은 <제7구단>, <동체이륙>과 같은 독특한 캐릭터를 지닌 스포츠물은 물론 예술과 기업, 과학 등 다양한 소재를 만화로 끌어들여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현세를 비롯한 대부분의 80년대 작가들이 사라진 21세기 만화계에서도 여전히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허영만은 맥이 끊긴 한국 만화사에 유일하게 현재진행형인 작가일 것이다. 이미 1974년 <각시탈>로 유명세를 탔던 그가 80년대 내놓은 작품들로는 <태풍의 다이아몬드(1982)>, <변칙복서(1983)>, <제7구단(1984)>, <카멜레온의 시>, <퇴역전선>, 1987년에 발표된 <동체이륙>, <고독한 기타맨>, <담배 한 개비> 등이 있다. 직선적이고 서사적인 스토리 구조를 가진 만화들이 유행했던 80년대 만화 풍토에서 허영만의 작품은 다층적이고 깊이 있는 주제와 탄탄한 리얼리티로 독특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신의 아들>로 대표되는 박봉성의 기업만화와 <촉산객> 등 무협시리즈물로 폭넓은 연령대의 팬을 확보하고 있던 이재학의 만화들도 슈퍼스타 이현세에 뒤지지 않을만큼 광범위한 인기를 누렸다.
독자적인 그림체와 수준높은 스토리로 매니아층을 확보했던 역사만화의 대가 ‘이두호’와 ‘백성민’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작가들이다. 화제가 되었던 <바람소리> 역시 <주간중앙>을 통해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연재되었다. 세밀하게 묘사된 역사 속 풍광과 복식 등을 배경으로 문학적인 작품을 만들었던 이두호는 이후 <째마리(85년)>, <덩더꿍(87년)> 등을 거쳐 1988년, 한국만화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객주>를 발표한다. <객주>는 2015년 4월, ‘바다출판사’에서 재발행되기도 했다.
한편 1983년 <선데이서울>에 발표한 <새야 새야>로 주목받았던 백성민은 원작자 황석영의 제안으로 1986년부터 <장길산>의 연재를 시작한다. 연재 내내 호평을 받았던 <장길산>은 1992년 총 20권으로 완간된 후 역사만화의 수작으로 기록되고 있다.
‘순정만화’의 르네상스 – 황미나, 신일숙, 강경옥의 활약
1980년대 만화 중흥의 한쪽 날개는 ‘순정만화’였다. 시대를 상징하는 하나의 문화코드로 통용될만큼 ‘하이틴 로멘스’라는 장르가 성행했던 80년대는 순정만화의 전설적인 작가들이 탄생하고 활동했던 시기이다. 당시에 유명했던 순정만화 작가들과 작품들을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당시 순정만화가 얼마나 큰 성취를 이루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80년대 초반의 대표적인 순정만화 작가는 ‘김동화’였다. 그는 1981년 <여고시대>에 연재를 시작한 <내 이름은 신디>를 비롯해 <아카시아(82년)>, <목마의 시(84년)> 등을 발표하며 인기작가 반열에 올랐다. 85년 <보물섬>에 발표된 <요정 핑크>는 1990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질 만큼 대중의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김동화 이후 1980년 순정만화의 전성기를 이끈 양대산맥은 ‘황미나’와 ‘신일숙’이였다. 그 두 작가는 탄탄한 스토리와 장대한 스케일로 남성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었다. 무엇보다 두 작가의 작품 속 여주인공들은 수동적이였던 기존 순정만화의 캐릭터에서 벗어나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그려지고 있어 재평가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황미나는 1980년 <이오니아의 푸른별>을 시작으로 <야누스데이(82년)>, <굳바이 미스터블랙(83년)>, <불새의 늪(84년), <우리는 길 잃은 작은새를 보았다(85년), <다섯 개의 검은 봉인(87년)> 등을 연이어 발표하며, 한국의 대표적인 만화가로 각인되었다.
김동화와 황미나가 순정만화 붐의 물꼬를 튼 후 80년 대 중반부터는 가히 순정만화의 ‘백가쟁명’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작가들이 활동을 한다. 80년대 중반 이후 뚜렷한 자기세계로 순정만화계를 이끈 작가들로는 김진, 신일숙, 김혜린, 강경옥 등이 있다. 김혜린의 <북해의 별(83년)>,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딸들(86년)>, 강경옥의 <별빛속에(87년)>, 김진의 <1815(87년)> 등은 현재까지도 소장본으로 꾸준히 발매될만큼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현세나 박봉성, 이재학 등 남성 작가들이 다수의 문화생을 통해 대량으로 작품을 생산하는 ‘프로덕션’ 시스템을 운영했던 것에 비해 순정만화 작가들은 1인 창작 시스템을 고집하며 자기만의 창작세계를 밀도높게 유지했던 것은 특기할만한 일이다.
이후 1988년 11월 국내최초의 순정만화잡지 <르네상스>가 창간되면서 이정혜, 이은혜, 원수연, 김기혜 등이 수준높은 단편 등을 발표하며, 이후 한국 순정만화의 계보를 이어가게 된다.
1980년대는 한국 만화의 절정기였다. 한국문화사 혹은 대중문화사를 논할 때 1980년대의 만화를 빼놓을 수는 없다. 1980년대 활동한 많은 만화가들을 피상적으로나마 거론하려면 아마도 두꺼운 한 권의 책이 필요할 것이다. 필자 역시 작품의 줄거리나 감상평을 단 한 자도 쓰지 못한 채 몇몇 작가의 이름과 대표작으로만 벌써 주어진 지면을 다 써버리고 말았다. 80년대 만화계를 풍성하게 하고, 지금도 누군가의 기억에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을 중요한 작가들인 하승남, 배금택, 조명훈, 강촌, 오일룡, 천제황, 한승원, 권현수, 이미라 등 많은 작가들의 이름과 작품들은 거론조차 하지 못했다.
기억상실의 문화, 단절된 만화의 부활을 꿈꾸며
흔히 현대 한국문화의 특징으로 ‘단절’을 꼽는다. 혹자는 ‘기억상실의 문화’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한국의 문화는 어제에서 오늘로 오늘에서 내일로 이어지지 못했다. 어제의 문화는 오늘의 여명이 밝기 전에 사라지고, 오늘의 문화는 자정의 시계소리와 함께 흔적없이 지워졌다. 새로 뜨는 태양과 함께 다시 만들어진 내일의 문화는 어제와 오늘의 문화를 잊었다.
만화 역시 단절이라는 한국문화의 한계를 이겨내지 못했다. 80년대 만화방과 팬들의 가슴을 가득 채웠던 작품들 대부분을 오늘 다시 구해볼 수 없다. 몇몇 작가의 작품이 ‘소장본’ 등의 이름으로 재발간 되기도 하지만, 극소수의 작가에 불과할 뿐이며, 그나마도 해당 작가의 한두 작품에 불과하다. 실제로 2015년 봄, 필자는 이상무의 <흙바람>이나 장태산의 <빈들에 서다>와 같은 몇몇 작품을 구하려 했으나 백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단절을 반복하는 문화를 가진 사회가 어떻게 피폐해지는지에 대해 자세히 말하는 것은 부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한 시대, 당대의 사람들을 위로하고 소통하게 만들었던 만화들이 다시 복간되기를 바라는 것은 단지 그 시절을 추억하고 싶은 개인의 한가로운 욕심만은 아니다.
사라졌던 만화방들이 ‘만화카페’로 이름을 바꾸어 다시 살아나고 있다. 비록 홍대나 대학로 등 한정된 지역에 불과하지만, 새로운 조짐으로 읽기에 충분하다. 서점에서 카프카나 김승옥의 소설을 꺼내 읽을 수 있는 것처럼 홍대의 ‘만화카페’에서 이현세의 <시모노세끼의 불빛>이나 김동화의 <내 이름은 신디>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 글은 <한국만화현대사 / 박인하 김낙호 공저 / 두보>와 <만화통사 / 손상익 저 / 시공사>에서 많은 부분을 참고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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