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 무어, 한 때 최고의 미녀 스타였다고는 하나 내 기억 속의 그녀는 사실 늘 조금은 초라한 모습이었다. 수십 만 달러를 들여 전신 성형을 했던, 애써 나이듦을 부정하던 애잔한 여배우 정도, 그게 내가 기억하는 데미무어였다. 그녀가 어리고 철없는 미남 배우 애쉬튼 커쳐와 연애를 하고 마침내 결혼을 했을 때도 나는 그다지 감흥이 없었던 것 같다. 온갖 상상 이상의 사건 사고가 벌어지는 헐리웃 세계의 일이니까.
그런데 이 커플이 예상 외로 알콩달콩 너무나 예쁜 것이었다. 수십만 달러의 전신 성형보다 강력한 사랑의 힘으로, 그다지 내 취향이 아닌 그녀의 얼굴이 사랑스러워보일 정도였으니! 한때 여성들의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타고 끊임없이 퍼 날라졌던 손바닥 낙서 애정행각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달콤했다. 고백하건대, 필자는 그 사진들을 보고 그들 사이의 사랑에 대한 의심을 마침내 접었었더랬다.
사랑의 본질이 무상한 건지, 진짜 사랑이 아니었던 건지 모르겠으나, 결국 이들은 ‘젊은 여성과의 외도-온갖 소문의 확산-이혼’ 이라는 통속적인 헐리웃식 결말을 맞이했다. (여담이지만, 꼭 그런 멍청한 파티걸이 등장해 모든 것을 망치더라. 불륜녀 사라 릴은 ‘그가 유부남인줄 알았다면 결코 만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희대의 명언을 남겼다. 애쉬튼이 유부남, 그것도 데미무어의 남편이라는 건 바다건너 우리도 다 알았는걸!) 그 후 데미무어가 재차 매달렸다는 이야기, 전남편 브루스 윌리스의 화끈한 중재 덕에 그나마 깔끔한 결론이 났다는 이야기, 데미무어의 딸이 충격으로 반항을 일삼았다는 이야기 등등 구질구질한 후일담이 들려오기도 했다.
당사자만 알겠지만 어쨌든 확실한 건 이 일련의 과정이 데미무어에게는 엄청난 상처로 남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녀는 수많은 파파라치 컷 속에서 쪼글쪼글한 피부와 부서질 듯 해골처럼 마른 몸으로 등장했고 많은 이들이 한마음으로 속상해했다. 그다지 팬이 아니었던 나도 왠지 한마음 한뜻으로 그 나쁜 놈을 욕해주고 싶었고, 위로가 되어주고 싶었을 정도니까. 강인한 눈빛을 지닌 그녀가 사랑 앞에서 한없이 여린 여자였음을 확인하니 왜 그리 마음이 먹먹했던지! 나와 같은 마음으로 세계 곳곳의 여성들도 그녀가 다시 반짝반짝 빛을 내며 다시 일어서주길 진심으로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몇해 전, 정말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그녀가 카메라 앞이 아닌 뒤편에서 당당하게 프로듀서로서 컴백한다는 소식! 그녀가 상처를 딛고 만들어낸 건 과연 어떤 이야기일지 못 견디게 궁금해졌다.
이른바 <The Conversation with Amanda De Cadenet>. 데미무어의 베스트프렌드이자 헐리웃 마당발로 통하는 배우 겸 포토그래퍼 아만다가 진행하는, 여성을 위한 인터뷰 토크쇼다. 자극적인 B급 리얼리티를 제작하던 애쉬튼 커쳐와는 정반대의 행보라고나 할까. 그리고 이 ‘대화’는 2016년에도 여전히 진행중이다.
매 시간 아만다는 헐리웃의 내로라하는 탑 여배우, 힐러리 클린턴 등 명사들을 만나 여성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눈다. 진솔하다는 수식은 마치 원색적인 것을 뜻하는 것처럼 오용되기도 하지만, 그녀의 토크쇼는 자극적이거나 억지스럽지 않은 날 것의 매력을 지녔다. 여성은 마치 소비에 미친 존재인 듯 과장하고 사치를 부추기지도 않고, 당장 전쟁터에 뛰어나가라는 듯 단정적인 어투로 특정한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저 각자의 삶의 방식, 가치관, 사랑, 꿈, 연애, 스타일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시청자가 ‘나’를 고민하게 할 뿐이다. 틈틈이 평범한 여성들의 솔직한 생각들이 등장하고, 인터뷰는 거의 반쯤 널브러진 자세로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서로를 편하게 응시하며 이야기하는 방식. 왁자지껄하고 억지스러운 방청객의 웃음 같은 건 없다. 쇼를 보는 내내, 예쁘고 포근한 집의 거실 한켠에서 아주 오랜 친구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이 든다.
얼마 전 읽은,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이라는 책이 문득 떠오른다. 1920~30년대의 이른바 ‘모던걸’들이 치열하게 사랑하고 살아갔던 방식에 관한 책이었다. 그들은 단발을, 자유연애를, 독신주의를, 직업의 자유를 애써 쟁취해야만 했고 그 중 하나를 얻는 것조차 죽을 만큼 힘들었던 시대에 살았다. 반면 오늘날의 우리는 그 모든 것이 거의 당연한 행운의 시대에 산다. 그들이 위태로웠던 반면, 우리는 훨씬 안정되고 성숙한 방식으로 삶의 가치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
30년대의 모던걸이라면, 호스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물개 박수를 치고, 그가 던지는 모든 화두에 300% 공감하는 다수의 여성 토크쇼를 보고 뭐라고 할까. 참 시시하고 발전없는 구시대적 여성들이라고 혀를 차지 않을까? 21세기 모던걸을 위한 대화의 방식, 그것이 <The coversation>이 지향하고 보여주는 바다.
빈티지 진에 하얀 티셔츠를 입고 화장기 없는 얼굴에 뿔테를 걸친 채 부스스한 머리로 레디,액션을 외치는 데미무어를 응원하며, 이토록 성숙하고 세련된 21세기형 모던걸 토크쇼를 만들어준 그녀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고마워요 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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