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 향기다.”
누군가 스쳐지나갈 때, 혹은 어떤 공간에 들어섰을 때 ‘그 향기’가 나면 나는 꼭 생각에 잠기곤 한다. 그 향기는 늘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낮잠을 잘 때면 늘 나던 나른한 그 향기. 그 향기가 정확히 어떤 향기인지 설명 할 수 없었지만 그 때의 햇살, 이불의 감촉, 바람의 느낌은 온전히 나의 기억이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은 마들렌 과자의 맛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린다. 나는 그 주인공이 어떤 마음으로 그 기억을 떠올렸을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그리움이 절반, 익숙함이 절반이었으리라.
이렇게 의도적으로 애쓰지 않아도 후각 또는 미각을 통해 떠오르는 기억들을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일화 기억’, 또는 ‘무의지적 기억’이라고 명명했다. 나는 그 중에서도 향기에 의한 무의지적 기억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향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향수가 빠질 수 없다. 개개인에게 어울리는 향이 다르고, 같은 향이라 해도 체취에 의해 향은 다르게 바뀌기 때문에 향수야말로 특정한 사람에 대한 일화 기억, 무의지적 기억을 떠올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다. 왜 그런 이야기도 있지 않나. 죽은 남자친구와 함께 있는 기분이 그리워서 그가 쓰던 로션을 왼쪽에 자신이 뿌리던 향수를 오른쪽에 바르던 여자의 이야기.
서론이 길었다. 이러한 내 머리 속을 부유하는 일화 기억과 무의지적 기억을 마주하기 위해 나는 향수 조향 클래스샵으로 향했다.
클래스샵의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부터 편안한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문구가 나를 사로잡았다.
“기억과 밀접한 후각, 향은 사람과의 추억을 공유합니다. 그 향기, 그 사람.”
나의 기억 저편의 무의지적 기억들을 끄집어냄과 동시에 내 향기도 누군가에게 편안한 무의지적 기억들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다.
설레는 마음으로 향수 디자이너 선생님과 내가 만들 향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향수를 만들기 전에 향에 대한 취향을 알기 위한 조향 차트를 작성했다. 수 십 가지의 향료를 시향하면서 탑노트, 미들노트, 라스트노트를 정해야 한다.
이 때 탑노트는 첫인상을 보여주는 향이다. 30분 정도 지속되고 탑노트가 판매율을 결정하기 때문에 조향사들이 탑노트에 심혈을 기울인다고 한다. 미들노트는 허트노트 혹은 소울노트라고도 하는데 2~3시간 정도 지속되고 보통 꽃향이나 과일향이다. 마지막으로 라스트노트. 잔향을 느끼게 해줄 수 있어서 베이스노트라고도 하는데 최대 24시간동안 지속되기 때문에 어쩌면 탑노트보다 더 중요하다.
조향 차트를 작성하면서 선호하는 향을 파악했다면 라스트노트부터 조향을 시작한다. 선호하는 향의 우선순위에 따라서 향료의 양을 정하면 된다. 향료 한 방울의 차이로도 향이 바뀔 수 있어서 조향할 때는 전자저울과 비커, 그리고 스포이트를 사용해 정교하게 작업해야한다. 나의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감성적인 향기가 눈금 하나하나 세심하게 탄생하는 거라 생각하니 더 소중했다.
향수가 예쁜 포장박스에 담기고, 향수 디자이너 선생님께도 향기에 대한 일화기억, 무의지적 기억을 여쭤봤다. 선생님은 창고의 귤 냄새가 고향 제주도를 떠올리게 한다고 하셨다. 창고의 눅눅함에 바다내음이 살짝 섞이고 끝 향에는 새콤한 귤 냄새.
누구에게나 향기에 대한 기억들은 존재한다. 코끝을 스치는 찰나의 순간에 그 기억들을 떠올렸을 때 마음 한 켠이 따뜻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그 향기의 명칭을 말하는 것보다 향기의 수식어가 존재하고 그걸 통해서 그 때를 떠올리게 하는 그 과정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향료들을 시향하면서 내가 좋아했던 ‘그 향기’가 붓꽃 향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붓꽃 향이라고만 표현하자 내 일화기억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향기를 설명하는 감성적인 부분이 증발하고 향기의 이름만 남아버렸기 때문이다. 향기가 기억과 추억과 얼마나 밀접하게 관계 맺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내가 정성들여 만든 향수에서는 가데니아와 샌달우드의 향이 묘하게 난다. 그러나 이보다는 나중에 누군가가 내 향수에 대한 일화 기억을 떠올릴 때의 표현이 더 궁금해진다.
‘그녀의 머릿결이 흩날리고 쏙 들어가던 보조개, 그리고 불어오던 바람에서 나던 향’ 이런 달콤한 표현일 수도 있겠지. 내 향기가 누군가의 행복한 일화기억 중 하나가 된다면 그 누군가의 마들렌이 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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