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로망은 다르다. 꿈이 가치라면 로망은 그 언저리쯤 들러붙어 있는 욕망이랄까. 그렇다면 내 꿈은 ‘함께 일하고 싶은 배우’, 로망은 열심히 작품을 찍고 돈을 왕~창 벌어서 1년의 절반쯤은 ‘한량처럼 여행 다니며 사는 것’.
23살의 여름, 이런 나의 로망을 커다란 여행용 백팩에 차곡차곡 담았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 어디라도 좋았으니까. 그리하여 선택된 것은 바로 내일로 여행! 여행의 테마는 “내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주자!”였다. 강릉부터 부산까지, 5일이라는 시간동안 나도 몰랐던 나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내 영혼을 보듬어줄 수도 있었다. 다시 치열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했지만.
우리는 인간답게 살기 위해, 치열한 현실 속에서 인간답지 못하게 살고 있다. 행복하기 위해 행복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박노해 시인은 우리에게 묻는다.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가질 준비가 되었느냐”고. 박노해 시인 사진전의 테마는 항상 마음의 평화, 안식처, 여유를 다루고 있다. 이번 인디아 사진전은 부암동에서 만날 수 있었다. 박노해 시인과 부암동이라…
생각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공간에서 그의 사진을 볼 생각에 들떴다.
자그마한 전시회는 소박했지만 사진에 담긴 여유로움과 행복감은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부암동의 공기와 박노해 시인의 사진들이 잘 맞아떨어져 그 마음이 더 증폭되었다. 내 발자국 소리가 타박타박 들리는 부암동의 길, 언덕을 열심히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한적한 곳들, 그리고 가을바람까지. 오랜만에 느끼는 이 일상의 여유가 더 없이 소중했다.
박노해 시인은 사진을 통해 말했다. “한 잔의 차를 급히 마실수록 차는 빠르게 바닥나듯 빠르게 달려갈수록 주어진 삶은 빠르게 줄어들지요.” 부암동을 걸으며 생각했다. 그래, 왜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한 잔의 차를 음미하지도 못한 채 원 샷을 하기에 바쁘지? 내 삶은 소주가 아닌데!
언젠가부터 바쁨이 열심히 사는 것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우린 항상 바쁘다. 매 순간 바쁨을 통해서 나의 쓸모를 증명해야하고, 그건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그럴 거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건 누구나 다 행복하기 위해 이런 삶을 산다는 것이다. 행복을 미래의 적금처럼 모아두고 지금 오늘 행복하지 못하다. 정말 행복하고 싶다면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살아야한다. 지금, 오늘, 여기에서 행복하지 못한데 미래에 행복한 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있는 힘껏 여유를 즐긴 후 부암동 언덕을 내려오면서 문득 <중경삼림>이 떠올랐다. 과거에 살고 있는 633과 미래에 살고 있는 페이. 나는 과연 어디 쯤 살고 있을까? 그들이 결국엔 현재의 서로를 만났듯 나 역시 현재의 행복을 소중히 여기려 한다. 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현재의 행복을 찾기를 바란다. 니체가 말하길 현재의 행복을 만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과거와 미래를 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가끔은 꿈과 로망을 베개 삼아 눈을 붙여도 좋다. 자, 그럼 이제 행복한 망각을 할 준비가 되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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