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한테 참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몇 년 전에 방송을 탄 한 건강기능식품 광고에서 등장한 유행어이다. 대놓고 TV 광고에 ‘정력’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돌려서 표현한 이 문구는 누리꾼들에 의해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를 남들에게 알릴 수 없는 아쉬움을 표현하는 식으로 패러디되기도 했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참 좋은 만화인데 어떻게 아는 사람이 없어서 나 혼자서만 이 흥미로운 작품을 보고 있어야 하는 게 아쉬웠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2000년대 이후 웹툰이 한국 만화의 대세가 되면서 대다수의 출판만화는 독자와 유리되었고, 또한 웹툰 내부에서도 연재하는 플랫폼이나 작가의 인지도에 따라 작품의 인지도가 갈리는 일이 발생한 지 오래다. 2013년 이후 <에이코믹스>나 <크리틱엠> 같이 만화 리뷰-비평 웹진이 생기며 좋은 만화가 안타깝게 묻히는 일은 조금이나마 줄었지만, 일 년에 수천 종이나 되는 만화가 나오는 상황에서 독자들에게 잊히는 작품은 여전히 나오고 있다.
물론 묻혀버린 모든 만화가 다 수작은 아니다. 묻힐 만해서 묻힌 만화도 수두룩하다. 하지만 그런 만화들 중에서 양질의 작품을 찾는 것은 마치 진흙탕 속에서 진주를 발견하는 기쁨과도 같다. 진가를 확인할 새도 없이 우리의 시선에서 사라진 좋은 만화들 중에서 다섯 작품을 추려보았다.
<골리앗>
구약 성경의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천주교나 기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아는 이야기이다. 무시무시한 힘을 지닌 포악한 거인 골리앗을 작은 소년 다윗이 돌팔매를 던져 때려눕힌다는 서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통쾌함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영국 만화가 톰 굴드가 그린 <골리앗>은 이 유명한 이야기를 살짝 비틀어 색다른 접근을 시도했다. <골리앗>의 주인공 골리앗은 성경에서 묘사되듯 거대한 체구를 가지고 있지만 그의 성격은 몸집과 정반대로 매우 섬세하고 가녀리다.
전투 대신 평화를 사랑하던 골리앗은 불행하게도 왕의 명령으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협하는 일을 맡게 되었고 결국 그로 인해 비극이 발생한다. 흔하디 흔한 고전 동화 비틀기에 지나지 않냐고 투덜거릴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게만 치부하기에는 <골리앗>은 전쟁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와 구조의 문제라는 것을 서정적으로 비추는 작품이다.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먼 과거의 전쟁 역시 말이다.
톰 굴드 만화, 김경주 옮김, 이봄, 2015년 1월, 정가 : 12,800원.
<와이 : 더 라스트 맨>
갑자기 지구에서 단 한 명을 제외한 모든 남자가 사라졌다고 생각해보자. 과연 그 남자는 행복할까? 남성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에로틱 코미디였다면 그 남자는 주지육림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겠지만, 미국 최고 만화에 수여하는 상 아이스너 상을 세 번이나 받은 <와이 : 더 라스트 맨>은 그렇게 허술하지도 않고 주인공을 호락호락 놔두지 않는다. 2002년 정체불명의 질병이 지구를 휩쓸며 남자들만이 줄줄이 사망하자 전세계는 혼란에 빠지고, 이유를 알 수 없이 지구에서 유일한 남자가 된 주인공 요릭 브라운은 그를 놓고 벌이는 음모의 소용돌이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한다.
만화는 남자들이 사라진 세계를 공상을 넘어 꽤 그럴 듯한 판타지를 구현해 작품에 현실감을 부여하고, 주인공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을 통해 독자들은 작품에 푹 빠져들게 될 것이다. 권당 250페이지의 중량과 2만원이라는 가격이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만화의 몰입감에 비하면 그런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브라이언 K. 본 원작, 박재용(1권) · 정지욱(2 ~ 5권) 옮김, 시공사, 2011년 8월 ~ 2012년 6월, 5권 완결, 권당 정가 : 20,000원(단, 1권은 18,000원).
<19년 뽀삐>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마영신이라는 만화가는 별다른 인지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독립 만화를 즐겨 봐왔던 이들에게 마영신은 분명 흥미로운 작가이다.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투박하지만 결국 작가 자신은 물론 독자들과도 가까운 삶의 모습을 정면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19년 뽀삐>는 마영신의 첫 웹툰이자 동물이 주인공인 첫 만화이다.
가정은 물론 학교에서도 소외당하는 소년 병걸과 병걸의 유일한 친구인 강아지 뽀삐는 달라 보이지만 결코 다르지 않다. 각자 종족도 생활도 다르지만 어린 나이에 너무 빨리 현실의 각박함을 접하면서 쉽지 않은 길들을 걸어가기 때문이다. 세밀하게 묘사되는 소년과 강아지, 두 삶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우울하고 씁쓸하지만 동시에 우리 곁에서 흔하게 접하지만 쉽게 지나치는 삶의 편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조각들은 소외되었던 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하나의 징검다리가 된다.
마영신 만화, 다음 웹툰에서 2015년 9월 9일부터 매주 연재 중.
<고교야구선수 자와 씨>
대다수의 독자들에게 야구 만화는 크게 세 종류이다. <거인의 별>을 위시로 한 박력이 넘치다 못해 판타지로 흐르는 열혈 만화, <다이아몬드 에이스> 같이 최대한 현실적인 시점에서 야구를 바라보는 스포츠 만화, <H2>로 잘 알려진 작가 아다치 미츠루처럼 야구만큼이나 등장인물들의 정서에 초점을 맞추는 드라마 만화. <고교야구선수 자와 씨>는 이 중 세 번째 분류에 좀 더 가까운 작품이다. 하지만 <H2> 등의 야구 드라마와 큰 차이가 있다면 이 작품의 주인공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점이다.
니센고교 야구부의 유일한 여자 야구선수 미야코 자와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 작품은 자와의 일상을 중심에 놓고 전개된다. 다른 부원들과 다를 바 없이 같이 훈련하고 함께 교류하지만 공식 대회에 나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 고등학교 생활이 끝나면 자와는 더 이상 야구를 할 수 없고, 2차 성징으로 인해 나날이 달라져가는 자와의 몸은 야구를 계속하기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자와는 그저 묵묵히 훈련을 하고 시합에 참여할 뿐이다. 직접적인 주장도, 자극적인 설정도 없지만 만화는 주인공의 행보를 통해 여자로써 야구를 한다는 것이 남자와 결코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단지 12권으로 완결된 만화가 한국에선 4권 이후로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미시마 에리코 만화, 강동욱 옮김, 미우(대원씨아이 임프린트), 2010년 7월 ~ 2012년 5월, 현재 4권까지 발매 중, 권당 정가 : 7,500원.
<정가네 소사>
<응답하라> 시리즈의 성공은 복고 열풍을 다시 터트리는 계기가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응답하라> 시리즈는 과거를 소재로 가져올 뿐 진정으로 과거를 말하는 작품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메인은 여자 주인공의 남편 찾기와 여러 남자들을 두고 벌이는 로맨스 쟁탈전에 있을 뿐, 과거라는 소재는 결말에 가까워질수록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이렇게 갈수록 박제가 되는 작품 속 과거가 아쉬웠다면 <정가네 소사>는 신선한 과거 회고 만화가 될 것이다.
만화가 정용연 본인과 가족들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이 작품은 제목의 ‘소사’라는 말대로 그리 대단하지 않은 일들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러기에 작품은 더욱 가치를 가진다. 한국 사회에서 평범한 이들의 삶은 큰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언제나 쉽게 잊히고 소외되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삶들은 결코 무시할 수 없고, 가족 개개인들에겐 무척이나 극적이고 인상적인 순간들이었다. <국제시장>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격동의 한국사를 거쳐온 작가 가족의 일대기는 한국사를 바라보는 하나의 이정표이자 작지만 소중한 일대기가 된다.
정용연 만화, 휴머니스트, 2012년 7월, 전 3권, 권당 정가 :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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