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 빨간 불, 마음을 만들기까지
생득이라는 말에 목적어를 평범함으로 둔다면 이것은 어불성설일까. 그런 어떻게 가졌다고 명증할 수도 과시할 수도 없는 일반적이고 마땅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탈락되었을 수 있다. 먼저 나는 독자로서의 위선을 고백한다. 비로소 윤재가 엄마와 표정을 맞댔을 때 ‘해냈구나’ 그의 등을 토닥였던 내가, 사실은 ‘보편적으로’ ‘본능’처럼 정상과 비정상 간 편 가르기 하는 눈을 가진 채 마지막까지 그렇게 윤재를 응시했다고. 하지만 자문해 본다. 정상인이라는 내가 윤재가 묻는 말에 핸드폰보다는 확실한 답을 내놓을 수 있는지. <정상적인 게 어떤 거니?>, <남들과 비슷하다는 건 뭘까? 사람은 다 다른데 누굴 기준으로 잡지?> 그 판정의 기준에 대해서 큰 고민 끝에 대답해 본다. 제가 가진 문제에 빠져들기보다 ‘나다움’을 유지하고 내면의 균형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이런 논리에서라면 머릿속 편도체가 작다든지 감정의 불능이라든지의 꼬리표가 붙은 윤재라도 틀림없이 정상이라는 진단을 받을 것이다.
도리어 다수는 윤재를 얼마나 이해하려 해봤을까? 주인공은 자신의 아몬드에 빨간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구멍가게 주인아저씨를 비롯해 자신을 아는 대부분의 남들에게도 ‘괴물’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그가 두려움과 공포를 모르는 면을 특히 괴상하게 생각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사건을 맞닥뜨리고 나서도 평정하고 침착한 데 이질감을 느꼈을 터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의 할머니 말마따나 <특별한 이쁜 괴물>이라는 편이 별명으로 어울리는 게 아닐지. 그의 공감의 결여는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튀지 말아야 해. 그것만 해도 본전이야>라는 엄마의 말을 곁에 두고 ‘보통사람’ 대열에 들어도 의심받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살았다. 소통이 불가한 ‘진짜 괴물’은 다름을 틀림으로 단정 짓고 그은 선 바깥으로 돌 던지는 주변 사람들이다. <희노애락애오욕>을 기득한 그 진짜 괴물들은 평균이라든지 일반적이라든지 대다수라든지의 말을 방패삼아 뒤에 숨었을 뿐이다.
<아무렇지도 않아>라는 무대응의 방호복을 입은 윤재는 주변의 자극과 야유에도 자신을 지켰다. 변하지 않는 표정을 일관하는, 다시 말해 ‘쫄지 않는’ 덕분으로 끝내 악의의 진을 빼놓는 식이랄까. 한데 그것은 윤재에게 방어기제로서가 아닌 그저 심상을 사용하지 않는 사고방식이다. 마음의 작용 없이 실체를 지각하고 고찰하는 식으로 본질을 궁리하는 것인데, 현상에 합리성을 찾지 못한다면 동조를 않는다. 그렇다면 세상은 이성으로 포착하지 못할 성가신 일들투성이일 것이다. 즉 윤재의 침묵과 차단의 습관은 세상에 만연한 이면과 본뜻의 까다로움이 무척 귀찮기 때문이었으리라. <자신이 하루에도 수십 번 차이고 밟히고 굴러다니고 깨진다는 걸 알게 되면, 돌멩이의 기분은 어떨까>. 감정이란 얄궂을 때가 많다. 부정적인 에너지를 내는 감정은 오히려 다스리거나 숨겨야 하는데, 그것은 가끔 몸집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불어나거나 높낮이 차가 너무 벌어져 종국에 인간을 덮쳐 잡아먹기도 한다. 자살의 원인은 대개 마음의 병 탓이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는 감정의 갑문이 있어 흐름과 유량을 조절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곧잘 든다. 어쩌면 그런 면에서 주인공에게 전화위복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나저러나 적요한 못에 물수제비뜨고 싶은 장난꾸러기들은 많다. 얄팍한 물결을 튀기기 전에 심원이 얼마나 그윽한지 모르고서. 곤이는 그런 부류에서도 두각을 보였다. 윤재가 제 엄마의 대리아들 노릇을 하는 모습에 더더욱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처음 주인공에게의 질투 어리고 파괴적이었던 공격은 질감이 점차 달라졌다. <겁쟁이 새끼야>, 공포란 걸 모르는 윤재를 향해서는 묘했지만 따지고 보면 곤이만이 할 수 있는 곧이곧대로의 비난이었다. <타고나? 그 말이 세상에서 제일 재수 없는 말이야> 동질을 상처를 맞대보며 느끼는 안타까움과 더 나아가 변화의 가능성을 더듬어보자 넌지시 위안을 건네는 진심이 엿보인다. ‘왜 그랬을까’, 엄마와 할머니를 칼로 찌르고 스스로 죽은 남자에 대해 윤재는 수없이 질문했다. <오늘 누구든지 웃고 있는 사람은 나와 함께 갈 것입니다>라던 그 남자는 <구하려는 노력을 그만둔 사람들> 사이에서 <구할 수 없는 인간>이 되어버린 곤이 그리고 주인공과 문제의 기저, 그 맥을 같이했다. 겉으로 둘은 뚜렷이 대조된다. 기를 쓰고 애써 눈을 감지 않으려 하지만 감기는 곤이와 애초에 눈을 감을 줄 모르는 주인공의 눈싸움은 승패가 언제나 똑같이 갈렸다. 또 주인공과 반대로 곤이는 엄마의 긴 부재로 모정에의 위화감이 컸다. 그러나 남들에게 쉽게 판단당하고, 온기로 기억하는 엄마의 손을 영영 놓치는 불행을 겪었다는 점에서 분명 닮은꼴이었다. 둘은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터 감으로써 차츰 서로를 깊이 들여다보며. 찾아가고, 친구가 된다. 피자 가게에서 이루어진 살벌했던 첫 대면의 ‘묘한 거울놀이’는 둘의 의외의 끈끈한 연결을 암시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니까 너랑 나도 언젠가는,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모습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럴 거야. 어떤 방향이든. 그게 인생이니까.> 최악으로 향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저 깊은 원망과 반항심으로 똘똘 뭉쳐 보이는 곤이의 속내는 수렁에 빠진 자신을 꺼내 달라는 외침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사실 이 대목은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나 긍정적으로 탈바꿈할 기적의 가능성을 잊지 않는 두 인물의 절절한 심정으로 보인다.
주인공 인생에 등장한 구원자들은 누군가를 쉽게 재단하지 않는다. 곤이는 물론이거니와 심박사와 도라 역시 그렇다. 그들은 주인공의 심연에서 감감히 일어 오는 움직임에 관계된다. 심박사는 주인공에게서 <타인과 소통하고 싶어 하는 의지>를 발견했다. <즐겁고 예쁜 걸로 연습하>라는 그의 권유는 도라를 대상으로 실천되었다. 심박사의 민감성이 주인공을 단념에서 전회시킨 셈이었고 도라의 존재는 가슴 속 색다른 촉수를 건드리면서 ‘마음’을 벙글게 한다. <도라가 올 때가 되면 등줄기가 욱신거렸다. 지진을 미리 느끼는 동물처럼, 폭풍우가 치기 전 땅 밖으로 기어오르는 벌레처럼.> 감각으로 머릿속 혼란을 앓자 ‘세상의 행간’에 돋보기를 대 보고 싶어진다. 단어 사이에 줄 사이에, 의미를 몰라도 상관없다던 책의 빈 공간 같던 주인공의 가슴에 작은 불씨가 켜진 것이다. 신성한 행위처럼 씹어만 대던 아몬드의 고소한 맛까지 음미하며 그 풍미를 온몸 구석구석 퍼뜨리고 있었다. 주인공의 선천적인 결핍을 체념하지 않게 도와준 사람들, 진정으로 걱정하고 관심을 주는 사람들과의 관계와 교류는 변화의 기적을 일으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엄마와 할머니의 죽음 바로 곁에는 두려움에 휩싸인 사람들이 있었다. 차마 나서지 못하고 상황을 외면한 사람들, 주인공은 그들이 ‘이루기 어려운 가치’에 도전한다. <존나 좋겠다, 아무것도 못 느껴서>라는 말을 듣는 주인공 역시 압력과 위협에서는 최소 물리적으로 큰 고통을 당한다. 하지만 전향하지 않을 흔들림 없는 자신과의 약속과 고유한 정신이 진정한 우정을 지켰고, 그렇게 나비를 짓이기며 울분을 터뜨렸던 곤이를 구원했다. 그리고 본인 또한 엄마를 마주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되었다. 누구라도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할 수는 결코 없다―외면할 수는 있어도. 그리고 누구도 이기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는 감정과 이성의 줄다리기 승패의 결과로 말할 수 없는 인간성의 문제다. 주인공에게는 살아가기 위한 고유한 자세가 있었다. ‘정상적으로 살 것’이라는 요구에 응하기 위해 현존과 경험으로부터 세상을 심오하게 성찰해 왔고 선입견이 주는 한계에 부닥쳤을 때 따라오는 고통을 겸허히 받아들여 왔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결여는 주인공에게 불운의 결정적인 순간 극복의 힘을 차근차근 만들어 갔다. 곤이의 불행은 윤재에게 염려하는 연민의 감정을 틔운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그 감정을 자유의지로 확장한 일이다. 타자를 위해서 자신이 기꺼이 외곽으로 나와 스스로를 희생할 용의를 가지고 정면돌파한 것이다. 자기희생이란 이미 도덕적 감정으로서 공감이 작동을 했다는 걸 증명한다.
‘마음’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주변의 선입견 없는 관심과 사랑, 주인공 내면의 단단함이 협력해 빛나는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이 있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조력했던 엄마,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주었던 할머니처럼 윤재를 지지하여 추후 성장에 가장 탄력을 준 사람들도 있었다. 비틀릴 만한 구석을 애초에 결속하고 쓸모없는 곁순을 깨끗이 정리해 주는 작업들을 기꺼이 해 주었기에 윤재의 밑줄기가 단단했던 것이다. 무시할 수 없는 수고다. 곁가지로 헌책방에도 공이 있다. 주인공에게 상상력과 안정감을 주었던 아지트이자 엄마에게는 못다 이룬 꿈에 대한 위로면서 현실적으로 가계를 유지시켜 줬던 다각적으로 유의미한 공간이다. 책은 주인공이 유일하게 주조할 수 있는 세계였고 제약 없이 무한한 연습을 허용해 주는 것이었다. 이 덕분인지 윤재는 일반인이 본능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것들조차 자기언어로 뜻풀이를 궁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온 표현은 창의적이고 독창적이면서도 감각적이었다. 그리고 완전하게 독립된 의미들이었다. 윤재의 말들을 읽는 동안 나는 주관적이고 본능적인 것들에 거리 둬 보게 되었다. 되도록 멀게. 약간이나마 그의 사정을 내 가슴에 전이했을 때 새삼스럽게도 빨간 불이 탁, 켜지는 느낌이 났다. 그와 나도 드디어 공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