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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의 단골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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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살던 곳을 떠난다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쉽지 않았다. 물론, 그곳에서 살던 기간이 1년 혹은 길어야 3년여 정도 일 수도 있지만 그건 단지 시간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에 ‘얼마나 오래’가 ‘얼마나 많이’를 결정하는 건 아닌 것 같다.

결혼 때문에 본가를 나와 이사하게 되면서 3년이 조금 넘게 살던 곳을 떠나게 되었다. 그 전에도 자취를 하면서 자주 이사를 다녔고 내가 태어났던 고향은 이미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떠나왔기 때문에 그 이후로 머나 먼 타향살이를 꽤나 오래 해왔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도시에 살게 되면서 부터는 자주 가게 되는 수퍼나 상점들은 있어도 서로가 서로를 자신 있게 단골이라고 부르는 곳은 거의 없었다. 굳이 그럴 필요성도 못 느꼈지만 상대방도 딱히 그렇게 생각해주는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곳이 생겼다. 지금은 이사를 나왔기 때문에 그 곳으로 자주 갈 일이 없으니 ‘생겼었다’가 더 맞는 말이겠다. 그 곳은 적어도 50대 후반에서 60대는 되어 보이는 장년층의 부부가 운영하는 아파트 단지 입구의 작은 약국이었다. 지하철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반대쪽 지하철 입구로 나가면 작은 시장에 제법 큰 약국이 두 군데나 더 있었기 때문에 장보기도 좋고 이것저것 고르기도 좋아 이 약국보다는 그 약국들이 더 장사가 잘 되는 것은 당연했다.

난 보통 퇴근을 하고 나면 대부분 시장이 있는 출구가 아닌 그 부부가 운영하는 약국이 있는 출구로 나왔기 때문에 그 약국을 찾게 되는 일이 훨씬 많았다. 물론, 약국이기 때문에 감기약, 파스, 활명수 등을 사러가는 것 외에는 그다지 자주 갈 일은 없었지만.

그 부부의 첫 인상이나 손님을 대하는 태도가 그렇게 훌륭하지는 않았다. 딱히, 불친절하거나 손님으로 하여금 불쾌한 기분이 들게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웃음기 없는 얼굴과 너무 조용하고 뭔가 권태로운 약국의 분위기가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곳은 내가 퇴근하는 길에 있고 다른 약국들보다 비교적 집에서 가까웠고, 무엇보다 밤 12시가 조금 넘는 시간까지 영업을 했으므로 비상약이 필요할 때는 유용하게 활용을 할 수 있었기에 그 약국을 찾게 되는 일이 점점 늘어났다.

어느 날, 밤늦은 시간에 어머니가 눈에 바르는 안연고가 필요하다며 사오라고 하셨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안연고는 의사의 처방이 필요하다. 과거에는 그냥 구입이 가능했는데 몇 년 전 부터는 처방전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의약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밤에 문을 연 병원이 근처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응급실에 갈 정도의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무 약국에라도 가서 잘 얘기해 사오라고 하셨다.

물론 좋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별 수 없어 일단은 집을 나왔다. 나는 먼저 시장 쪽의 약국을 갔다. 시장 쪽은 약국이 두 군데라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었는데 결과는 당연히 거절. 게다가 다른 한 곳은 문을 닫은 상태였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좀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문을 열고 있을 그 약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주인아저씨(아마도 이 분이 약사이실 것이다.)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무표정하게 나를 쳐다보셨다. 내가 목례로 인사를 하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셨다. 물론, 무표정이었다.

“저기, 혹시, 안약.. 안연고 있어요? 제가 지금 좀 필요해서요.”

 

그러자 아저씨는 당연한 대답을 하셨다.

“아, 그건 처방전이 있어야 하는데.”

 

그랬다. 그리곤 몇 초간은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리 단골이신데… 드릴 수가 없어 어쩌죠. 일단 임시방편으로 이 안약이라도 사용하시는게 어떨까요?”

 

당연히 처방전이 있어야 한다는 말에 그냥 인사를 하고 돌아나가려던 나는 ‘단골’이라는 단어에 살짝 놀랐다. 그 때 당시 기억으로 약 2년이 넘게 그 약국을 이용하면서 별다른 얘기도 주고 받은 적이 없는데다 정말 수요(구매)와 공급(판매)의 관계라고만 생각했었던 나와는 달리 약국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나를 단골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한 편으론 미안하고 또 한 편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정말 별 일 아니었지만, 아니, 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약국에 대한 아무런 애정이나 특별한 관심이 없던 내게 그 날, 그 아저씨의 발언 이후로 그 약국은 나의 ‘단골 약국’으로 변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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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난 당연히 그 약국을 자주 애용했다. 두 분은 변함없이 늘 무표정이었지만 내가 인사를 하고 이런저런 사소한 이야기를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하시고, 어떤 때는 묻지도 않은 자신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해주시기도 했다. 물론 그렇게 길거나 깊이 있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약사와 손님의 관계였지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젠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단골이라고 인식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또 어느 날 밤, 약국에 활명수를 사러갔었는데 아저씨는 안 계시고 아주머니 혼자 계셨다. 그래서 여쭤보니, 아저씨는 피곤하셔서 먼저 집에 들어 갔다고 하셨다. 그래서 또, 이런저런 간단한 안부를 묻다가 밤늦게까지 영업을 하면 피곤하지 않으시냐는 질문을 했다. 사실, 돈을 더 많이 벌기위해 이렇게 늦게까지 영업을 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을 몇 번 했었기에 별다른 기대 없이 답변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의 대답은 또 나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늦게라도 오는 사람들이 있거든. 우리가 늦게 오는 분들을 위해서 조금씩 문 닫는 시간을 늦추다보니 이젠 매일 자정이 좀 넘게까지 약국 문을 열어 놔. 우리 때문에 밤늦게라도 약을 사러오는데 우리가 문 닫으면 안 되잖아.”

 

난 아주머니의 말에 또 놀라고 말았다. 살짝 소름이 돋기도 했다. 늦게라도 약국을 찾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 한두 명을 위해서(사실, 그 중 한 사람이 아마도 나일 것 같다.) 매일을 자정을 넘기고 집으로 돌아가신다는 사실에 나의 때 묻은 생각이 보기 좋게 뒤집어져 버린 것이었다.

별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다지 감동적인 일들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래도록 ‘단골’이란 말을 잊고 살았던 나에게 그리고 더 많이 팔기 위해서가 아닌 ‘밤늦은 시간에 응급약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영업을 하시는 그분들에게 난 왠지 모를 고마움을 느꼈다.

인천으로 가기위해 짐을 싸서 이사를 나오던 날, 약국에 음료수 한 박스를 가지고 들어갔다. 이제 결혼을 해서 인천으로 가게 되니 아마도 자주 못 올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두 분은 평소의 무표정과는 달리 환하게 웃으셨다. 물론 많은 말씀을 하진 않으셨다. 잘 살라고 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오랜만에 생겼던 나의 단골을 떠나왔다. 그냥 감사하고 기분이 좋았다. 서로를 알고 인정해준다는 것이 정말 행복한 일이란 걸 아주 오랜만에 깨달았다.

오랜만에 그 동네를 찾아갔더니 아파트 단지 전체가 재개발에 들어가면서 그 약국과 편의점, 그리고 내가 즐겨 이용하던 미장원까지 동네 전체가 사라져버렸다. 아쉬운 순간이었다. 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마산의 아파트 단지도 십 수 년 전에 재개발과 함께 사라져 잃어버린 유년의 추억이 되었는데, 내 30대 초반을 보냈던 서울의 그 아파트 단지 역시 사라지면서 또 다른 추억들이 기억과 사진으로만 남게 되었다.

공사장 너머로 보이는 약국이 있던 그 자리를 살짝 들여다보았다. 이제 약국도 사라지고 약사 내외분도 어디로 가셨는지 알 수 없지만 종종 떠오르는 추억 덕분에 단골에 대한 좋은 기억과 함께 또 어딘가에서 만나게 될 좋은 가게, 약국, 식당과의 웃음이 번지는 관계를 만들어나갈 생각을 하니 아쉽던 마음이 조금 나아진다.

우리 삶이 그런 것 같다. 계획하고 마음먹고 하는 일들도 중요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삶 속의 소소한 기쁨들이 우리를 더욱 오래도록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라는 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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