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nu
콘텐츠 마케팅 전문 회사 콘텐타 매거진

[책 리뷰] 바싹 말라버린 사랑

thesunpine

회피가 미덕인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느낀다. 미디어가 발달하고, 개인이 수용할 수 있는 정보량이 초과하게 되면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많은 정보와 문제들을 회피하고 있다. 모르는 게 약인지, 아는 게 힘인지는 상황마다 다르지만, 이제는 우리가 회피를 넘어 무감각해진 게 아닌가 싶다. 빠르게 끓어오르고, 쉽게 식어버리는 군중을 지칭하는 ‘냄비근성’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말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를 보면 ‘냄비근성’이 무엇을 지칭하는 단어인지 알게 된다. 언론과 소셜미디어에서 화제인 사건에 열광하던 도중, 그 사건의 결과조차 보지 않고 다른 문제로 시선을 돌려버리곤 한다. 어떤 게 중요한 건지, 무엇이 진실인지, 현실은 무엇인지 이제는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내가 말하고 있는 지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 있다. 리처드 플래너건의 소설, <들끓는 꿈의 바다>에서는 진실과 사랑, 진정한 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애나’의 한 대사가 이 소설의 주제를 관통하고 있다. “술에 취했을 때 토미가 하는 말에 따르면, 침묵은 진실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무엇인가? 소음이다. 사방에서 조잘거리는 소리.” 소설의 주인공, 애나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다. 엄청난 부자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자본을 지니고 있고, 직장에서 또한 애나의 위치는 뚜렷하다. 이런 애나에겐 큰 걱정이 있다. 첫째, 자신의 신체 일부가 자꾸 사라진다는 사실. 둘째, 애나의 어머니인 프랜시가 천천히 진전되는 암인 림프종을 앓고 있는 것. 셋째, 20대인 아들과 사이가 소원하다는 것이다.

 

회피의 얼굴들

<들끓는 꿈의 바다>는 픽션이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SNS와 각종 뉴스에서 여러 사건사고가 쏟아져 나오지만, 정작 의논해야 할 문제를 놓치며 살아간다. 심각한 기후 위기로 인해 산불이 진행되고 있지만 서로 의견이 분분한 정치인들, 산불로 인해 타죽고 있는 동물의 사진을 보며 ‘좋아요’ 버튼을 누르는 사람들. 어딘가 익숙한 모습이 아니던가. 어느 날부터 애나의 신체 일부가 하나, 둘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손가락, 두번째에는 무릎(•••) 그러나 신체의 일부가 사라져도 사람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애나 또한 타인의 신체가 사라져가는 것을 똑같이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애나가 지하철에 탄 순간 사람들도 두 명 중 한 명꼴로 눈이 하나밖에 없거나 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애나는 결국 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사람들과 대화를 해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른 화제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이다. 이는 더 큰 자극으로의 회피라고 볼 수 있다.

 

오랜 시간 동안 림프종을 없애기 위해 치료를 받던 프랜시는 애나를 포함한 본인 자식들에게 “LET ME GO”라고 말하며 자신의 의사를 밝힌다. 그는 더 이상 억지로 수명을 늘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애나와 프랜시의 막내아들, 터조는 프랜시의 의사를 단숨에 무시한다. 자신들의 죄책감, 불안감, 연민을 투영해서 어머니를 살려내는 것에 더욱더 집착한다. 프랜시를 살려내고자 했지만, 프랜시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의사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애나가 보기에 프랜시의 몸에는 남은 것이 없어 보였고, 마치 겨울나무에 들러붙은 것 같은 피부만이 남아있었지만 의료진들은 치료를 통해 차도가 있다고 말한다. 프랜시의 육체와 영혼은 점점 소멸해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무엇이 차도가 있다는 걸까? 애나와 터조는 각자의 집착으로 인해 근본적인 현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다.

 

애나의 삶에서 또 다른 문제 중 하나인 아들, 거스와의 관계 또한 애나는 회피해 왔다. 거스는 방에서 게임을 하며 은둔 생활을 한다. 은둔 생활은 비롯하여 거스는 애나의 현금과 귀중품을 훔친다. 애나는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거스에게 말할 수 없다. 거스는 애나의 물건을 훔칠 때면 다정한 아들로 변했기 때문이다. 같이 저녁밥을 해먹고, 통상적인 모자 (母子) 사이를 연출할 수 있었다. 따라서 애나는 거스의 도둑질을 알고도 눈 감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모습은 잠깐의 안정을 위한 진실로부터의 도피라고 할 수 있겠다.

 

소멸해가는 건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들도 마찬가지였다. 매년 새로운 동물들이 멸종했으며, 불에 타서 사라져갔다. 이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노랑배도라지앵무새’는 매년 봄마다 돌아오지 못하고, 알에서 부화하지 못한 상태로 사라진다. 대부분 사람들은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지만, 과학자 ‘리샤 산’만이 ‘노랑배도라지앵무새’가 사라지는 걸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다. “가끔 그녀는 새들이 앙심을 품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지쳐서, 자신들을 도우려는 인간의 노력이 자꾸 실패하는데 지쳐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 같다고. 세상이 그들에게 워낙 적대적이기 때문에” 

 

더 큰 자극, 각자의 집착, 진실을 가리려는 온갖 움직임 등 근본적인 문제로부터 도망치는 모습은 다양하다. 동시에 이 책에서 다루는 비극은 세상의 많은 것들이 소멸해가는 걸 넘어서 비극을 깨닫지 못하는 비극이다. 정혜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므로 지금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다.’ 삶이 힘들다는 이유로,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수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린 일이 너무나도 많다.

 

4월 16일, 세월호 10주기가 돌아왔다. 그 사이에 다양한 일들이 일어났다는 핑계로 잊고 지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다짐을 잊고,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던 나를 돌아본다. 나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른 화제에 정신이 팔린 동안 단원고에서, 4.16기억 전시관에서, 팽목항 등에서 리샤 산과 같이 묵묵하게 자리를 지켜온 활동가들이 있다. 모두가 근본적인 문제로부터 도망치는 동안 본래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곳곳에 존재한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봉사정신뿐만 아니라 나와 너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너무 늦기 전에 사라지는 것을 막으려고 그녀가 이렇게 애쓰는 것은 바로 그 사랑인 듯싶었다. 때로는 가뭄 때의 강바닥처럼 사랑이 바싹 말라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44031558671.20231118075358.jpg

근본적인 현상의 사라짐을 막기 이전에 해야 할 일들이 있다. 그건 바로 애정과 사랑을 되돌리는 것. 사랑은 행동하게 만든다. 사랑은 회피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는 힘을 만들어 낸다. 자연의 사라짐, 인간성의 사라짐, 정체성의 사라짐. 그리고 진실의 사라짐을 되돌리기 전에 먼저 우리는 강바닥에 바싹 말라버린 사랑부터 되찾아야 한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