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부도를 처음 받던 날 지도가 그렇게 많이 그려진 책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러나 더욱 잊을 수 없던 순간은울퉁불퉁하게 그린 산의 그림을 본 날이었다. 강아지 마냥 높은 줄도 모르고 올랐던 산을 바로 위에서 내려 봤을 때 높이를 표현하는 방식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높은 곳은 위로 볼록, 낮은 곳은 아래로 볼록하게 그려진 그림만 보았을 뿐인데 초등학생인 나에게 산의 높이는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것만 같았다.
어른이 된 어느 날 하이힐을 즐겨 신는 나를 발견했다. 어떤 날은 하이힐을 신지 않으면 왠지 주눅이 들 곤 했다. 키가 작아서 늘 앞자리에 앉았던 나에게 하이힐은 콤플렉스를 해방시켜주는 마법과 같았다. 단지 5cm 높아지는 것 뿐 이었는데 나의 자존감까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이것이 성인이 된 내가 느끼는 사회적 높이였으리라.
사회시간에 배우던 위도와 경도, 높이는 진짜 사회생활을 해보니 대학, 직업, 자동차, 아파트 평수, 아이의 성적 등 그 이름이 수 만 가지를 가진 괴물이었다. 사물의 높이와 위치를 재는 용어가 아니라 사람의 사회적인 자리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것을 아는 순간 어린 시절 보았던 경이로운 산의 높이도 아니요, 벽지처럼 둘러싸인 글자도 아닌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높이를 나타낼 하이힐의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높은 하이힐을 신은 사람은 그림자도 길어서 낮은 사람을 잡아먹기도 했다. 때로는 긴 그림자 옆에 붙어서 작은 그림자를 살려 보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긴 그림자에 선을 하나 더 그은 꼴이 되곤 했다.
그러나 하이힐은 오래 서있으면 다리가 퉁퉁 붓기도 하고 발가락이 아파서 남들 안볼 때 신발을 벗어서 훅훅하고 발에 바람을 쐬어야할 정도로 불편했다. 하지만 벗을 수는 없었다. 어느 날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고개를 들어보면 다른 사람의 허리만 보일 때도 있었다. 누구인지 얼굴도 안 보이곤 해서 주눅이 들기도 했기에 더더욱 하이힐은 분신처럼 한 몸이 되어갔다.
그렇게 불편한 하이힐을 고집하던 어느 날 초대를 받아 누군가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현관 입구에서 하이힐을 벗으니 갑자기 세상이 훅하고 꺼지는 것 같아 불만이 살짝 들었다. 신발을 안 벗어도 되는 곳에서 만났으면 하는 원망스런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잠시 후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발바닥에 전해지는 따스함이었다. 나도 모르게 스르르 마음이 녹는 게 아닌가. 손님이 오면 발 시릴까 싶어 미리 보일러를 켜놓은 주인장의 배려였다.
요즘은 ‘카.페.인.중독’이라는(카카오스토리,페이스북,인스타그램) 말이 있을 정도로 자신을 과시하는 사진과 글이 난무한다. 남들은 다 잘 사는 것만 같아서 휴대폰을 볼때마다 씁쓸할 때가 많다. 하지만 카메라를 돌려보면 내가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나좀봐주세요.’라는 애정을 갈구하는 반의어이다.
그만큼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나 권력, 사회적인 명성을 보여주고 자신이 얼만큼 높은 곳에 사는지 과시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너무 높으면 주위에 아무도 없어서 오히려 춥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높은 곳으로만 가고 싶었던 나는 그날의 노근고근한 따뜻함이 사회적 좌표를 찍어주던 위도나 경도를 덮어버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로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불결을 가진 사람이 되자고 결심했다.
뜨끈뜨끈한 밥을 짓는 아궁이 속 불이 될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하는 촛불이 될지, 달콤한 군고구마를 굽는 난로 불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내 깜냥이 어느 정도 되느냐에 달려있겠지만 내가 불결이 된다면 차가운 마음과 언 손발을 녹여주어 이 세상을 따뜻하게 밝히는 불길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불결같은 삶을 살아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