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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 증후군과 개연성

snowhite26

  초등학교땐가 리셋 증후군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다. 컴퓨터를 껐다 켜면 새로운 환경이 되는 것처럼 요즘 젊은이들의 게임 중독의 부작용이 어쩌구저쩌구.. 나와는 상관 없었다. 그저 잘 지어낸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약 20여 년 후 어느 날 잠들기 직전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나는 일평생 나의 리셋 증후군에 시달렸구나.’

  항상 “그럴 수 있지”를 말하고 다닌다. 그럴 수 있거나, 혹은 없는 일 사이에는 나만의 안전망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지구 멸망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이야기 속에나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세계에서 펼쳐지는 가시적인 사건은 아니다. 실제 가능성을 믿는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그럴 수는 없지만 가능성이 있어도 어쩌겠냐는 반응일 것으로 보인다. 그냥 애초에 이런 생각을 잘 하지 않거나 즐기는 선에서 끝난다. 나는 다른 지점에서 충격을 받을 것이다. 내 세계에서 저건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인데, 저건 말이 안되는데, 그 혼란스러움이 나를 뒤흔들 것이다.

  남들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난 그렇다. 이 또한 나의 완벽주의와 줄기를 같이 한다. 통제해야 한다. 나와 관련된 모든 물체와 사건 존재는 내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래야 완전히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실패를 유달리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에게 없는 레퍼런스와 배경지식은 늘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예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상할 수 없으면 그 다음의 행동을 선택하기 어렵다. 끝을 알 수 없는 일은 두렵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사회인으로서 매우 불리한 성격이다. 안정성이 높은 일을 선호한다. 사소한 일이라도 전문성을 찾는다. 그래야 내가 예상할 수 있는 폭이 조금이라도 넓어 진다.

  극단적으로,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은 무조건 나를 좋아해야 한다. 이는 불가능한 전제임을 잘 알기 때문에 난 차라리 회피하기로 했다. 그간 모른 척 쳐내 버린 인간관계는 귀찮다는 핑계로 진행되었지만 사실 나는 무서웠다. 답장을 하나 하면 다시 답장이 온다. 내용 하나하나는 나만의 까다로운 검열을 거쳐야 하는데 너무나 많은 경우의 수는 검사자이자 당사자인 나를 지치게 했다. 그럴바에 무시한다. ‘흐린 눈’으로 보면 안 보인다. 지금 나의 카톡 친구는 9명, 사실 좀 부끄럽다.

  나의 ‘리셋증후군’은 원래의 의미와 전혀 다를 수도 있다. 여기에 내 인생의 힌트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이금이 작가의 소설 ‘유진과 유진’에서 작은 유진이는 아픈 상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판타지라고 생각했지만 실재로 존재하는 증상이다. 내 과거가 아무렇지 않은 건 사실이었고 저런 소설 속 이야기는 그저 훌륭한 장치였다. 이미 내 컵은 넘쳤었던 걸 인정해서는 안되었던 걸까. 그때의 나는 벼락치기하듯 미뤄둔 숙제같은 감정을 온전히 감당해 낼 수 없었다.

  결국엔, 혹은 그럼에도 내게 남은 것은 그 감정이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 현재의 내 모습은 과거의 모든 감정과 개연적 관계를 맺고 있다. 좋든 싫든 지금의 나는 그렇다. 과거에 매달리는 게 바보같은 이유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나는 나에게 개연성을 갖는다.  이렇게 또 나를 토닥인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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