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사랑과 수많은 이별
어릴 적의 나는 작은 것들을 사랑했고, 헤어짐에 유달리 애처로운 아이였다. 그래서 아끼던 인형이 낡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친척 언니가 집으로 가야할 때, 강아지 달래가 죽었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 때마다 나는 많이도 아파했다. 사소한 슬픔에 많이 앓아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나는 오히려 셀 수 없이 많은 헤어짐 앞에 시니컬해졌다. 언제든 헤어질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사람들을 대했고, 한 발은 상대방에게 다른 한 발은 바깥에 두고 여차 하면 도망칠 준비를 하고서는 사소한 것들을 사랑하지 않으려 노력해왔다.
그래서였을까? 나를 떠나갔던 옛 애인들은 하나같이 “너랑 있을 때는 같이 있어도 외로웠어.”라는 극적인 대사와도 같은 말을 남겼다. 그 당시에는 그들이 참 ‘쿨’하지 못하다고 여겼지만 어쩌면 나는 이별의 슬픔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헤어져도 아프지 않을 정도의 사랑만을 해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몇 번의 이별 끝에 깨달은 것이 있다면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하는 것이 이별에 있어서는 좋다는 것이었다.
솔직함과 덤덤함의 사이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 살고 있는 올링카 비스티카와 드라젠 그루비시치는 내가 25년에 걸쳐서야 알게 된 좋은 이별에 대한 정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연인이었던 그들은 헤어진 후, 일반적인 사람들의 이별 공식과는 달리 연인으로서의 추억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독특하기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형식과 내용의 전시가 점차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한국에서도 전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라리오뮤지엄의 <실연에 관한 박물관>의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스스로의 감정을 솔직히 바라본 결과를 담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지각색의 이별, 그리고 실연의 범위는 생각보다 굉장히 넓었다. 연인, 부모님, 배우자, 반려동물, 고향, 혹은 변해버린 나 자신까지…….
그리고 익명으로 기증된 작품들의 외면은 평범했지만 담고 있는 의미는 평범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어디에서나 흔하게 살 수 있는 향초, 그 안에는 아까워서 미처 불 한 번 붙여보지 못한 헤어진 연인의 첫 선물이라는 애틋함이 담겨있었다. 여기에 웬 호빵이 있지 하는 생각에 들여다 본 작품 속에는 4·3항쟁 당시 끌려간 할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싶었던 할머니의 절절함이 녹아있어 잠시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내 숨을 턱 막히게 했던 작품은 곱게 접혀 있는 패딩 조끼였다. 작품의 제목은 <아버지가 벗어 놓은 패딩 조끼>. 기증자의 아버지는 수 년 전 분신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 아끼던 패딩 조끼는 방 안에 개어둔 채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기증자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선물했던 옷이었는데, 그 옷이 불에 타버리면 제 마음이 많이 아플까봐 이건 남겨두신 것 같아요.” 그 순간 탄산을 들이킨 것 마냥 목이 꽉 막히고 따끔거렸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버거웠을텐데 이제는 그러한 이별의 감정과 솔직하게 마주보려는 기증자가 직면한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이별이 왜 그랬는지 아는 것
전시의 기획자 올링카 비스티카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다.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어떤 일들은, 그 일을 경험하기 전의 나와 다른 나를 만들어줍니다. 실연에 따르는 아픔이야말로 그렇습니다. 이별의 경험은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사실이다. 내 삶의 전부라고 믿었던 사람과 모르는 척 지나가야만 하는 순간이 오고 내 반쪽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떨어져나가면 나는 한쪽 발이 짧은 의자처럼 삐걱거렸다. 그리고 그 때마다 혼자라는 느낌은 심해지기만 했다. 하지만 적어도 <실연에 관한 박물관>은 그 누구도 홀로 두지 않는다. 누군가의 물건을 보며 공감하기도 하고, 함께 슬퍼할 수 있는 감정의 교집합이 존재하기에 전시는 관람객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일종의 정서적 체험을 제공한다. 각자의 개인적인 경험이 모두가 공감하는 보편성을 갖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를 사랑한 시간들의 흔적은 적어도 진실을 담보하고 있음을 모두가 확인할 수 있었고 그 속에서 관람객들은 위안을 얻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올링카 비스티카는 연인과의 헤어짐을 전시하는 작업을 통해 외로움의 터널을 통과한 이별이 사람을 한 단계 성숙하도록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실연에 관한 박물관>를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나는 과연 이별의 감정에 솔직했었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음을 느끼는 순간 나는 내가 사랑했던 것들과 제대로 헤어져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지금 헤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아닌 척 괜찮은 척 옆으로 밀어놓았던 감정들을 다시 한 번 내 앞으로 다시 끌고 와서 마주하는 과정이다. 헤어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헤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배어나오는 이별의 슬픔을 그 어느 때보다 힘껏 견디고 있다. 아직 버리지 못한 상자, 비가 오는 날이면 떠오르는 기억들, 달래와 비슷한 강아지를 볼 때 울컥 차오르는 감정, 유자차를 마실 때 할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
빈틈없이 가득 채워 하루를 보내지만, 꽁꽁 숨어있는 감정을 끄집어내어 얼굴을 맞대고 있을 때면 제대로 헤어지지 못한 실연의 여백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여백 사이사이에는 이별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인지 가끔 감정의 상처들이 벌어질 때면 여백의 사이로 그 때의 슬픔이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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